디가니까야(장아함경)의 영어원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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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 (영문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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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시사야도(1904-1982): 사야도는 뛰어난 학문적 업적과 정신적 깨달음으로 인해 1952년 당시의 미얀마 대통령에 의해 아가마하판디타(Agga Maha Pandita: Exaltedly wise one)에 추대되었다. 독립 직후 미얀마는 태국과 캄보디아에 나웅얀 사야도와 마하시 사야도 그리고 두 명의 불자를 파견하여 결집을 상의하고 상좌부 불교국가인 스리랑카, 라오스와 함께 제6차 경전 결집 계획을 수립하였다. 역사적인 제6차 결집(Sixth Buddhist Council)은 1954년 5월 17일에 개최되었고, 이 결집에서 마하시 사야도는 최종 편집자와 질의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 결집에서는 빨리 경전뿐만 아니라 논서(論書-atthakathās)와 복주(tīkās-논서를 다시 주석한 것)도 교정되었다. 이러한 논서의 교정에 있어 마하시 사야도는 논서의 비평적인 분석과 음운의 해석, 의견이 갈리는 부분에 대한 최종 결론의 도출 등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제6차결집에 있어 의미 있는 일은 대승불교권에 테라와다 불교(상좌부 불교)에 대한 관심을 살리는데 있었다. 결집이 진행되고 있던 1955년 일본의 승려와 여신도 12명이 테라와다 불교를 공부하러 미얀마에 도착하여, 스님들은 사미의 자격으로 여신도는 사미니의 자격으로 테라와다 불교의 승려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뒤 1957년, 미얀마에서 보낸 테라와다 불교의 포교사들이 큐슈의 모지불교협회의 요청으로 일본에 도착한다. 같은 해인 1957년 마하시 사야도는 청정도론 (Visuddhi-magga Atthakathā)의 입문서를 팔리어로 편찬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는데, 천재적이며 뛰어난 붓다고사존자에 의해 쓰여진 이 논서가 잘못 전해지거나 그릇되게 해석된 부분을 상세히 논파하였다. 1960년 마하시 사야도는 이 어려운 임무를 훌륭하고 깊이 있게 완성하였으며 또한 불교명상에 있어 유명하고 권위 있는 이 논서 4권 중 2권을 미얀마어로 번역하였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빠사나(Vipassanā)수행방법

위빠사나 혹은 통찰 수행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정신적-신체적(물리적) 현상의 성격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말한다.

여기서 신체적(물리적) 현상이란 우리 주변에서 분명하게 지각된 사물이나 대상을 말한다. 우리가 지각하는 몸 전체란 한 덩어리의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정신적인 현상이란 의식작용이다. 이러한 물질과 정신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할 때마다 생겨남이 분명히 지각되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을 관찰하여 매번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닿고, 생각할 때마다 이러한 사실을 ‘봄, 봄’, ‘들음, 들음’, ‘냄새, 냄새’, ‘맛, 맛’, ‘닿음, 닿음’, 또는 ‘생각, 생각’이라고 주시해야만 한다.


그러나 수행 초기에는 일어나는 모든 사실들을 주시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분명하고 쉽게 지각되는 것을 주시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호흡을 할 때마다 배가 일어나고 꺼지는 이 운동은 항상 분명하게 일어난다. 이것은 풍대(風大: Vayodhātu, 동적 요소)로 알려진 물질적인 특성이다. 누구나 이 움직임을 의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배를 유심히 관찰하는 마음으로부터 이루어진다. 숨을 들이쉬면 배가 불룩해지고 ‘일어남’이라고 마음속으로 주시하고, 배가 꺼질 때는 ‘사라짐’이라고 마음속으로 주시해야 한다. 만약 움직임이 분명하지 않아서 정신적으로 인지할 수 없으면 손바닥은 배에 대면된다.

숨 쉬는 법을 바꾸지는 말아야 한다. 천천히 혹은 빨리 하지 말아야 한다. 또는 너무 깊이 하려고 애써서도 안 된다. 숨쉬는 방법을 바꾸게 되면 쉽게 지친다. 꾸준히 평상시대로 호흡하면서 있는 그대로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을 주시하면 된다. 주시할 때는 소리내어 말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한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당신이 뭐라고 이름짓고 말하든 상관없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알고, 느끼는 것이다. 배의 일어남을 주시할 때에도 움직임이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마치 눈으로 그것을 보듯이 주시해야 한다. 배가 꺼질 때에도 이와 같이 한다. 움직임이 일어남과 동시에 인식하는 방식으로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을 주시한다. 움직임과 움직임에 대한 정신적인지는 마치 표적을 맞추려는 돌처럼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배가 사라지는 움직임도 이와 같이 한다.

배 움직임을 보는 동안 마음이 다른 곳을 방황하게 되는 수가 많다. 이럴 때에 또한 ‘방황, 방황’이라고 마음속으로 말해야 한다. 한 번 혹은 두 번 주시되면 마음이 방황하는 게 멈춘다. 이렇게 되면 다시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만약 마음이 어느 곳으로든지 가면 ‘감, 감’이라고 주시하고, 머릿속으로 누군가를 만나면 ‘만남, 만남’이라고 주시한다. 그리고 난 다음 다시 배의 일어남, 사라짐으로 되돌아간다. 만약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하는 상상을 할 경우 ‘말함, 말함’이라고 주시한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생각이나 회상이 일어나면 꼭 주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상하고 있으면 ‘상상’이라고 주시하고, 생각을 하고 있으면 ‘생각’이라고, 계획을 하고 있으면 ‘계획함’, 자극을 느끼면 ‘느낌’, 회상하고 있으면 ‘회상’, 행복하다고 느끼면 ‘행복’이라고, 싫증이 나면 ‘싫증’, 기쁘면 ‘기쁨’, 낙담하고 있으면 ‘낙담’이라고 마음속으로 주시한다. 이렇게 모든 의식행동을 인식하는 것을 심수관(心隨觀 : cittānupassanā) 이라고 한다.


이렇게 의식행동을 주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의식행동들을 한 사람 혹은 개인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상상하고, 생각하고, 계획하고, 아는 (지각하는) 것이 바로 ‘나’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한 개인이 있어 살고 생각해 온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개인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에 단지 계속적이고 연속적인 의식행동들만이 있을 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의식행동들을 인지하고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의식행동이 매순간 일어날 때부터 주시해야 한다. 이렇게 주시하면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배의 일어남 사라짐을 주시하는 것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오랫동안 명상을 하고 앉아 있으면 뻣뻣한 느낌과 열기가 몸에서 일어날 것이다. 이것들 역시 신중하게 주시되어져야 한다. 아픔이나 지루함 역시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 이러한 모든 감각들이 고수(苦受 : dukkhavedanā 불만족감)이며, 이것들을 인식하는 것은 수수관(受隨觀 : vedanānupassanā)이다. 이러한 감각들을 모두 다 인식하지 못하고 놓치는 경우 “나는 굳어있고, 열이 나고, 아프다. 좀 전에는 모든 것이 잘 되었는데 이제는 불쾌한 감각들 때문에 불편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감각’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실제로 개입되는 ‘나’란 없다. 단지 새로운 불쾌한 감각이 계속해서 꼬리를 물고 연속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마치 계속적이고 연속적으로 전기충격이 이어짐으로써 전등을 켜는 것과 같다. 매순간 몸에서 불쾌감이 계속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감각은 그것이 뻣뻣하거나, 덥거나, 아픔이 되었거나 간에 신중하고, 진지하게 주시되어야 한다. 실제 수행의 초기에는 이러한 감각이 강해져서 자세를 바꾸고 싶은 욕구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욕구는 주시되어야만 하


‘인내심이 열반으로 인도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수행에 있어서 가장 적절한 말이다. 수행 중에는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 몸이 뻣뻣해지거나 열이 난다고 자주 움직이고 자세를 너무 자주 바꾸면 삼매(samādhi: 좋은 집중력)를 계발하기 어렵다. 삼매를 계발하지 못하면 통찰력을 얻기 어렵고, 이와 더불어 도(道: magga, 열반에 이르는 길)와 과(果: pjala, 이 길의 결과․열매)와 열반에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수행에 있어서 인내심은 필수적이다. 몸이 경직되고, 열이 나고, 아프고, 참기 어려운 것과 같은 몸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불쾌한 감각도 잘 참아야 한다. 수행 중 그러한 감각이 일어나자마자 수행을 포기하거나 자세를 바꾸어서는 안 된다. 참고 계속해서 ‘뻣뻣함, 뻣뻣함’ 혹은 ‘더움, 더움’ 등으로 즉시 그것을 주시해야(알아채야)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으면 이런 종류의 보편적인 감각들은 사라지게 된다. 집중력이 잘되고, 섬세하면 강한 감각들조차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나면 곧 배의 일어남, 사라짐을 주시하는 것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물론 이러한 감각을 오랫동안 관찰했음에도 불구하고 감각이 사라지지 않고 참을 수 없게 되면 자세를 바꾸어야 한다. 이때에는 먼저 ‘자세를 바꾸려고 함, 자세를 바꾸려고 함’을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만약 팔이 올라가면 ‘올라감, 올라감’이라고 관찰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아주 천천히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하며 ‘올라감, 올라감’, ‘움직임, 움직임’ 그리고 ‘닿음, 닿음’ 등으로 계속 주시해야 한다.


만약 몸이 흔들리면, ‘흔들림, 흔들림’ 이라고 관찰해야 한다. 또 발을 들면 ‘듬, 듬’, 움직이면 ‘움직임, 움직임’ 놓으면 ‘놓음, 놓음’이라고 관찰해야 한다. 만약에 변화가 없으면 비록 잠깐 쉬는 동안에라도 다시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것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 사이에 잠깐이라도 틈이 생겨서는 안 된다. 앞서 주시한 행위와 앞으로 할 행위 사이에는 틈이 없이 계속 연결되어야 한다. 앞선 삼매(Samādhi: 집중상태)와 다음 삼매는 틈이 면밀히 연계되어야 하고, 앞선 지적행위와 다음에 이어지는 지적행위는 빈틈없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 오로지 그렇게 할 때만이 비로소 지적상태가 성숙된 단계로 올라가게 될 것이다. 도(道: magga)와 과(果)의 지(智)(Phala-nana: 길에 대한 지식과 그 열매)는 이러한 순간이 계속 모아질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명상 과정은 두 개의 나무토막을 계속 힘을 다해서 불꽃을 일으킬 때까지 쉴새없이 부벼대야만 필요한 열을 얻어서 불을 피우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위빠사나 수행에서의 주시도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든지 간에 각 관찰행동 사이에 잠시도 빈틈이 없이 꾸준히 계속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면 가려움증이 생기면 참기 어렵기 때문에 수행자는 곧 긁고 싶어한다. 이때에는 긁어서 곧바로 가려운 감각을 없애 버리지 말고, 가려운 감각과 이 감각을 없애고자 하는 욕망이 주시되어야만 한다. 동시에 긁으면 가려움증이 없어지는 것도 관찰해야만 한다.


만약 가려운 곳을 긁지 않고 꾸준히 계속해서 주시하면 가려움증은 일반적으로 사라진다. 이렇게 되면 다시 곧 배의 일어남 사라짐을 주시해야 한다. 만약 주시를 해도 가려움증이 사라지지 않으면 물론 긁어서 가려움증이 없어지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선 그렇게 하고자 하는 욕망을 먼저 관찰해야 한다. 이러한 감각을 없애고자 하는 과정에 포함된 모든 움직임은 주시되어야 한다. 특히 닿고, 잡아당기고, 밀고, 긁는 움직임을 주시해야 하며, 종국에는 배의 일어남, 사라짐의 현상관찰로 되돌아 와야 한다.


매순간 자세를 바꿀 때도 우선 바꾸고자 하는 의도나 욕망을 먼저 관찰한 다음 계속해서 각 움직임을 면밀히 주시해야 한다. 예를 들어앉은 자세에서 일어나거나 팔을 들거나 움직이고 펴는 모든 움직임을 면밀히 주시하도록 한다. 그리고 움직이는 동작을 주시함과 동시에 자세를 바꿔나가야 한다. 몸이 앞으로 움직이면 그것을 주시한다. 일어날 때는 몸이 가벼워지면서 일어선다는 것도 알아채야 한다. 이러한 것에 마음을 집중시킬 때에는 ‘일어섬, 일어섬’이라고 신중하게 주시한다.


수행자는 마치 중병환자처럼 행동해야 한다. 건강한 사람은 쉽게, 빨리,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그러나 중병환자는 매우 천천히 신중하게 행동한다. 이와 같이 허리가 아픈 환자도 허리를 다치거나 통증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아주 신중하게 일어난다.

그러므로 명상수행자도 그들처럼 행동해야 한다. 아주 점진적이고 신중하게 자세를 바꾸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만이 집중이 잘되고 통찰력도 좋아진다. 그러므로 아주 느리게 서서히 움직이는 것부터 시작한다. 일어날 때는 마치 환자처럼 행동하고, 동시에 ‘일어섬, 일어섬’이라고 주시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눈에 무엇이 보여도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무슨 소리가 들려도 이와 같이 해야 한다. 수행 중에 수행자의 관심은 오로지 주시하는 것에만 집중되어야 한다. 보고 듣는 것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괴상하고 충격적인 어떠한 것을 보고 들어도 못 보거나 못들은 척하고 오로지 신중하게 주시만 해야 한다.


몸을 움직일 때에도 중병환자처럼 아주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 신중하게 팔과 다리를 움직이고, 구부리고, 펴며, 머리를 숙이고, 들어올린다. 이런 모든 움직임은 천천히 진행되어야 한다. 앉았다가 일어설 때에도 매우 천천히 해야 하며, ‘일어섬, 일어섬’이라고 마음속으로 주시해야 한다. 그리고 반듯이 서면 ‘서있음, 서있음’이라고 주시한다. 여기저기를 쳐다볼 경우 ‘쳐다봄, 봄’이라고 관찰한다. 걸을 때는 발걸음을 주시하며 오른발을 들었는지 왼발을 들었는지를 관찰한다. 발을 들어서 놓을 때까지 개입되는 연속적인 움직임을 모두 알아차려야만 한다. 오른발로 걸었는지 왼발로 걸었는지 각각 나가는 발자국을 주시해야 한다. 이것이 빨리 걸을 때 주시하는 방법이다.


빨리 걷거나 약간 먼 거리를 걸을 때 이와 같은 방법으로 주시하면 그것은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걷거나 Cankama걷기(위․아래 걷기)를 할 때에는 각 걸음을 세 단계로 관찰해야 한다. 발을 들어서, 앞으로 내밀어, 놓는 것이 그것이다. 우선은 들고 놓는 것부터 관찰한다. 발을 드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채야만 한다. 이와 같이 발을 놓을 때에는 발이 ‘무겁게’ 내려가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채야만 한다.


각 걸음마다 ‘듬, 놓음’을 주시하며 걸어야 한다. 이틀쯤 지나면 이렇게 주시하기가 훨씬 쉬워질 것이다. 그리고 나면 그때부터 비로소 위에서 언급한 ‘들어서, 앞으로 내밀어, 놓음’이라는 세 가지 움직임을 주시하도록 한다. 처음에는 오로지 하나 혹은 두 가지 움직임만을 보기가 쉽다. 그러므로 빨리 걸을 때는 ‘오른발, 왼발’, 천천히 걸을 때는 ‘듬, 놓음’을 관찰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걷다가 앉고 싶을 때에는 우선 ‘앉고 싶어함, 앉고 싶어함’이라고 주시한다. 그리고 실제로 앉을 때에는 몸이 ‘무겁게’ 내려가는 것을 면밀히 관찰한다.


일단 앉으면 다리와 팔을 가지런히 하기 위해 하는 움직임을 주시한다. 만약 그런 움직임이 없고 몸이 단지 고요하다면(정지상태에 있다면) 곧 배의 ‘일어남, 사라짐’을 주시한다. 배의 ‘일어남, 사라짐’을 주시하는 도중에 무릎이 뻣뻣해지고 몸의 어딘가에서 열이 난다고 느끼면 계속해서 이들을 주시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다시 배의 ‘일어남, 사라짐’으로 되돌아온다. 이렇게 주시하는 도중에 눕고 싶은 욕망이 생기면 이것을 주시한 후, 누울 때 팔과 다리의 움직임을 주시한다. 팔을 들어올리고, 움직이고,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몸을 움직이고, 다리를 펴고 눕기 위해 몸을 기울이는 등의 모든 움직임이 주시되어져야 한다.


이렇게 누울 때 주시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움직임(즉, 눕는 것) 도중에 확실한 지식(magga-ñāna와 phala-ñāna, 길과 그것의 결과의 지식)을 획득할 수도 있다. 삼매(집중)와 지혜(통찰력)가 강하면 확실한 지식은 어느 순간에든 나타날 수 있다. 단순히 팔을 ‘구부리거나’ ‘펴는’ 도중에 나타날 수도 있다. 바로 이렇게 해서 아난다(Ānanda) 존자도 아라한이 되었다.


아난다 존자는 제1차 불교도회의(경전결집회의) 바로 전날 밤에 아라한과를 얻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열심히 정진하고 있었다. kāyagatāsati로 알려진 일종의 위빠사나 수행을 밤을 새워 하고 있었다. 발걸음을 주시하고, 오른발 왼발, 을 관찰하며, 들어서, 앞으로 내밀어, 놓는 움직임과, 걷고자 하는 욕망과 걷는데 따르는 모든 일어나는 순간순간 면밀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거의 새벽이 다 되도록 계속하였지만 그는 아라한과를 얻지 못하였다. 그는 걷기 수행을 너무 많이 하였다는 것을 깨닫고, 삼매(집중)와 정진(Viriya, 노력)의 균형을 잡기 위해 잠깐동안 누워서 명상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그의 방에 들어가서 침상에 앉은 다음 몸을 눕혔다. 이렇게 하는 동안에도 그는 ‘누움, 누움’을 관찰하였으며, 순간 그는 아라한과를 성취하였다.

아난다 존자가 눕기 전에는 단지 수다원(Sotāpanna, 예류자(預流者) 즉, 승리자의 대열에 낀 분, 열반에 이르는 첫 번째 단계에 이른 분) 이었다. 수다원위(Sotāpannahood: 예류위(預流位))에서 수행을 계속함으로써 사다함(Sakadāgāmihood, 일래위(一來位) 즉, 한 번 되돌아오는 자의 상태, 혹은 길(道)의 두 번째 단계를 이룬 분), 아나함(Anāgāmihood, 즉 되돌아가지 않은 상태, 길의 세 번째 단계를 이룬 분)과 아라한(Arahatship, 즉 길의 마지막 단계를 이룬 성스러운 분의 상태)에 이르렀다. 이렇게 연속적으로 보다 높은 세 단계에 이르는 데에는 잠깐 사이였다. 아라한에 이른 아난다 존자의 예를 생각해 보라. 이러한 성취는 어떠한 순간에라도 찾아올 수 있으며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매순간 부지런히 주시해야 한다. 주시를 늦추지 말고 “이렇게 잠깐인데 별 상관없겠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눕는 데 관련되는 모든 움직임과 팔 다리를 가지런히 하는데 따르는 모든 움직임은 신중하고 면밀하게 주시되어져야 한다. 움직임이 없고 가만히 있을 땐, 다시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주시하는 것으로 되돌아간다. 시간이 늦어져서 잠잘 때가 되어도 금방 잠들지 말고 계속 관찰을 놓지 말아야 한다. 매우 진지하고 열성적인 수행자는 잠을 전혀 안 잘 듯이 마음 챙김에 전념해야 하며, 잠에 떨어질 때까지 계속 수행하여야 한다. 만약 수행이 잘되고 우세하면 잠에 떨어지지 않는다. 한편 졸음이 우세하면 잠에 떨어진다. 졸음이 오면 ‘졸음, 졸음’이라고 주시해야 하고, 만약 눈꺼풀이 내려오면 ‘내려옴,’ 무겁거나 둔해지면 ‘무거움’, 만약 눈이 쿡쿡 쑤시면 ‘쑤심’이라고 주시한다. 이렇게 졸음은 가시고 눈은 다시 맑아질 것이다.


수행자는 그때 ‘맑음, 맑음’이라고 주시한 후 계속해서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주시한다. 어쨌든 수행자가 끈기 있게 수행을 계속하지 않으면 졸음이 올 때 잠에 떨어지게 된다. 잠에 떨어지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실 매우 쉽다. 누워서 수행을 하다보면 점점 졸리고 마침내 잠에 떨어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초보자는 누운 자세로 너무 많이 수행해서는 안 된다. 되도록 앉거나 걷는 자세로 훨씬 더 많이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시간이 늦어지고 잠잘 때가 되면 누운 자세에서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주시하면서 수행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잠이 들 것이다.


수행자에게 있어서 자는 시간은 휴식시간이다. 그러나 아주 진지한 수행자는 잠자는 시간을 네 시간 정도로 제한한다. 이것은 한밤중 시간으로 부처님에 의해 허용된 시간이다. 네 시간만 자면 충분하다. 초보자가 네 시간만 자는 게 건강을 위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다섯 시간 내지 여섯 시간으로 늘릴 수 있다. 여섯 시간의 수면은 건강을 유지하는데 분명코 충분하다.


수행자가 잠에서 깨어나면 곧 바로 관찰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진정코 도지(道智: magga-ñāna)와 과지(果智: phala-ñāna)에 이르고자 라는 수행자는 잠을 잘 때에만 쉬어야 한다. 그 외의 시간, 깨어있는 순간에는 계속해서 한순간도 쉬지 않고 주시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깸, 깸’이라고 그의 마음이 깨어난 상태를 주시해야 한다. 만약 아직 이러한 상태를 알아차릴 수 없다면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주시하는 것부터 시작하도록 한다.

만약 잠자리에서 일어나고자 하면 ‘일어나려고 함, 일어나려고 함’을 주시한다. 그 다음엔 계속해서 팔과 다리를 조정하기 위해 하는 모든 변화하는 움직임을 관찰해야 인식한다. 머리를 들고 일어설 때는 ‘일어남, 일어남’이라고 주시한다. 앉을 때는 ‘앉음, 앉음’이라고 주시한다. 팔과 다리를 조정할 때 움직임이 변화하면 움직임은 또한 주시되어야 한다. 만약 이러한 움직임이 더 이상 없고 단지 조용히 앉아 있게 되면, 다시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주시하는 것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세수를 하거나 목욕할 때에도 이와 마찬가지로 주시한다. 이러한 행위에 개입되는 모든 움직임들이 다소 빠르게 진행될지라도 될 수 있는 한 많은 움직임을 주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옷을 입고 잠자리를 치우는 행위나 문을 열고 닫는 행위들도 모두 가능한 한 매우 면밀히 주시해야 한다.

식사를 할 때 밥상을 바라보면서도 ‘바라봄, 바라봄’이라고 주시해야 한다. 음식을 향해 팔을 뻗치고, 음식에 손이 닿아서 모으고 조정해서, 들어서 입에 가져오며 고개를 숙이고 음식물을 입에 넣고, 팔을 내리고 고개를 다시 드는 이런 모든 움직임들은 그때그때 주시되어야 한다. (이러한 주시법은 미얀마식 식사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포크나 숟가락, 또는 젓가락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적절한 방식으로 움직임들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음식을 씹을 때는 ‘씹음, 씹음’ 이라고 주시하고, 음식의 맛을 알게 되면 ‘암, 암’이라고 주시한다. 음식의 맛을 느끼고 삼켜서 음식이 식도를 따라 내려가는 이 모든 일어나는 일들을 주시해야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수행자는 음식을 한 숟가락 한 숟가락 들 때마다 매순간 주시한다. 국을 먹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팔을 뻗쳐서 숟가락을 잡고 뜨는 등등의 모든 움직임들이 주시되어야 한다. 식사시간에는 관찰하고 주시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식사시간에 주시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초보수행자는 주시해야 할 것을 몇 가지씩 놓치기가 쉽지만, 처음부터 모두 다 주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물론 초보수행자가 빠뜨리고 보거나 몇 가지를 놓치는 것은 할 수 없지만 그의 삼매가 강해지면 이 모든 일어나는 일들을 면밀하게 주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 수행자가 주시해야 할 것들을 너무 많이 언급하였다. 그러나 요약해보면 주시해야 할 것들은 몇 개 되지 않는다. 빨리 걸을 땐 ‘오른발, 왼발’을 주시하고, 천천히 걸을 땐 ‘들어서, 놓음’을 주시한다. 그리고 조용히 앉아 있을 때는 단지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주시한다. 특별히 주시할 것이 없다면 누워 있을 때에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주시한다. 이렇게 주시하는 동안 마음이 방황한다면 일어나는 의식행위를 주시한다. 그리고는 다시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으로 되돌아온다. 또한 몸의 뻣뻣함이나 고통, 아픔, 간지러움 등의 감각도 일어날 때마다 이와 같이 주시한다. 그리고는 다시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으로 되돌아온다. 다리를 뻗고, 움직이며 고개를 숙이고, 들고, 몸을 흔들고 쭉 펴는 행위도 나타나는 대로 주시해야 한다. 그리고는 다시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으로 되돌아온다.


이렇게 수행자가 주시를 계속해나가면 일어나는 일들을 점점 더 많이 주시할 수 있게 된다. 처음에는 마음이 이리저리 떠다녀서 많은 것을 주시하지 못하고 놓쳐버리기 쉽다. 그렇다고 낙담해서는 안된다. 모든 초보자들이 다 그런 어려운 경험을 한다. 그러나 수행을 하면 할수록 마음에 떠다니는 모든 행위를 알아차릴 수 있게 되며, 마침내는 마음이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게 된다. 마음이 주의 집중대상으로 꽉 차 있으면 마음집중 행위는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같은 주의집중대상과 거의 동시에 발생하게 된다.(다시 말하자면 배의 일어남은 그것을 주시하는 행위와 동시가 된다. 배의 사라짐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신체적(물리적) 집중대상과 주시라는 정신적 행위는 한 쌍처럼 발생하고 있다. 이 발생과정에는 어떠한 사람도 개체도 개입되지 않는다. 단지 신체적(물리적) 집중대상과 주시하는 정신행위만이 한 쌍처럼 함께 발생할 뿐이다. 이때에 수행자는 실제로 개인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주시하는 동안에 수행자는 배가 일어남이 신체적(물리적) 현상이며, 그것을 주시하는 정신적 행위가 정신현상이라는 것을 식별하게 된다. 배가 사라질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이러한 정신적․신체적(물리적) 현상이 함께 한 쌍으로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매번 주시행위를 할 때마다 수행자는 집중의 대상인 물질적 특성과 그것을 주시하는 정신적 특성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스스로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식별력은 명색식별지(名色識別智: nāmarūpa-pariccheda-ñāna)로 불리우며, 관지(觀智: vipassanā-ñāna)의 시작이다. 이러한 인식을 정확하게 얻는 것은 중요하다. 수행자가 관찰을 계속한다면 이어서 원인과 결과를 구분하는 능력, 즉 연섭수지(緣攝受智 : paccaya -pariggaha-ñāna)라고 불리는 인식을 얻게 된다.


수행자가 주시하기를 계속해 나가면 모든 일어나는 것은 잠시 후에 사라진다는 것을 스스로 보게 된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물질적․정신적 현상이 어릴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일생을 계속할 것이라고 단정짓는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영원히 지속되는 현상은 하나도 없다. 모든 현상은 일어났다가 금방 사라져버려 눈 깜짝할 순간동안도 지속하지 않는다. 수행자는 이러한 사실을 주시를 통해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이런 모든 현상의 덧없음(무상함)을 확신하게 된다. 이러한 확신을 무상관지(無常觀智: anniccānupassanā-ñāna)라고 한다. 이러한 경험은 고수관지(苦受觀智: dukkhānupassanā-ñāna)로 이어져서 이 모든 무상함이 곧 고통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또한 수행자는 온갖 몸의 고통을 겪기 쉬우며, 몸은 곧 고통의 집합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도 또한 고수관지이다. 다음으로 수행자는 이러한 모든 정신적이고 신체적(물리적) 현상은 어떠한 개체도 자아 그 자체도 구성하지 않는다. 이러한 깨달음을 무아수관지(無我受觀智: anattānupassanā-ñāna)라고 한다.


수행을 계속하다 보면 수행자는 이러한 모든 현상이 무상(無常: anicca), 고(苦: dukkha)와 무아(無我: anatta)라는 것을 확고하게 깨닫게 되며 이렇게 하여 열반에 이르게 된다. 이전의 모든 부처, 아라한 및 성자들은 바로 이러한 길을 통해 열반을 실현했다. 모든 명상수행자는 그들 자신이 바로 지금 이러한 념처(念處: sati-patthāna)의 길에 들어서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과정(道)에 대한 지(智)(phala-ñāna), 열반법(Nibbāna-dhamma)을 이루고자 하는 소망을 실현해 나가고 있는 중이며, 또한 자신의 바라밀(공덕의 완성)을 익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런 사실에 기쁨을 느낄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전에는 전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오로지 부처, 아라한, 성자들만이 경험했던 삼매(집중에 의해 얻어진 마음의 고요)라는 숭고한 체험과 지혜(초세간적 인식, 지혜)를 얻게 된다는 기대감으로 기쁠 것이다.

오래지 않아 수행자들은 모든 부처, 아라한 및 성자들이 경험한 도지(道智: magga-ñāna), 과지(果智: phala-ñāna)와 열반법(Nibbāna-dhamma)을 스스로 체험하게 될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체험은 수행을 시작한 지 한 달, 혹은 20일, 혹은 15일만에 이루어질 수 있다. 특별히 바라밀이 출중한 수행자들은 이 법들을 7일 이내에 체험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위에서 말한 기간 내에 이 법을 이루리라는 신념과,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tthi. 자아에 대한 신념)과 의심 (vicikicchā 의심, 불확실성)으로부터 벗어나며, 악도에 다시 태어날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리라는 확신 속에 기꺼이 머물러야 할 것이다.

모든 수행자들이 수행을 잘해서 부처, 아라한과 성자들이 체험한 열반을 어서 빨리 성취하시길 바랍니다.


사두(sādhu, om"kk)! 사두(sādhu, om"kk)! 사두(sādhu, om"kk)!

착하도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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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욱 사야도 법문집 (영문파일)

http://www.dhammaweb.net/dhammabook/author.php?author=Pa Auk Sayadaw

미얀마 파욱 사야도(Pa Auk Sayadaw)가 지도하는
호흡관(ànapànàsàti) 수행법 (1)


일중(一中) 스님 인도 델리대학교 불교학과 박사과정
지난해 11월 30일 ‘근본불교 수행도량 홍원사’에서는 국제세미나가 열려 호흡관(a-na-pa-nasati) 수행을 주제로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때 파욱 사야도의 호흡관 수행에 대한 특별법문과 사마타 수행으로서의 호흡관 수행을 해 보는 집중코스도 있었다. 매일 저녁마다 법문과 함께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으며, 낮에는 사야도와 함께 수행도 하고 개개인의 수행을 점검하는 인터뷰도 하였다. 이 글은 사야도의 세미나 법문, 4일간의 저녁법문 그리고 몇 권의 책과 2차 자료들을 참고하면서, 사야도가 지도하는 사마타 수행으로서의 호흡관에 대해서 정리한 것이다.
희망에 부풀었던 21세기의 새 출발은 전쟁, 테러 등 여러 문제들과 자연재난 등으로 심하게 얼룩지고 말았지만, 한편 다행스럽게도 이 지구 땅에는 ‘수행과 명상(meditation)’이라는 새로운 봄의 기류가 흐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에는 특정한 소수의 사람들만 수행해 왔다면,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수행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른바 ‘수행의 보편화’ 시대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자들이나 수행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남방 수행법’ 하면 바로 ‘위빠사나’ 라고 익숙하게 알고들 있다. 그러나 남방불교 수행법에는 사마타 수행(samatha-bhàvànà)과 위빠사나 수행(vipassanà-bhàvànà), 두 가지가 있다. 이 글에서는 위빠사나 수행보다 사마타 수행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특히 미얀마의 파욱 센터에 계시는 파욱 사야도(Pa Auk Sayadaw)가 지도하는 사마타로서의 호흡관 수행법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룰 것이다.
사마타 수행의 큰 스승, 파욱 사야도
미얀마의 남부도시, 몰라민에는 파욱(Pa-Auk) 숲 속 센터가 있다. 드넓은 산자락을 의지하고 수행센터가 자리잡고 있는데, 가운데 계곡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큰 선실과 후원, 비구스님들과 남자 수행자들의 거처가 있고, 계곡의 오른쪽에는 틸라신(사미니 스님들)과 여자 수행자들의 거처가 있다. 그리고 산 위쪽으로 올라가면 집중수행에 전념하는 소수의 외국인 비구스님들과 남자 수행자들이 머무는 별도의 꾸띠들이 있는데, 바로 그곳에 파욱 사야도, 아친나(Achinna) 스님이 주석하고 계신다.
김재성 선생은 「세계의 수행자-미얀마 파욱 사야도」라는 『법보신문』의 기사(797호)에서 파욱 사야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파욱 사야도(1934- )는 10세에 출가하여 ‘아친나’라는 법명으로 사미가 되었고, 20세에 비구계를 받았다. 사원의 전통교육을 받으면서 고급빨리 시험에 통과하고, 1956년에는 사설법사 시험에 합격하여 법사(Sasanadhajasiripavara -dhammàcariya)가 되었다. 1964년에는 마하시 센터에서 마하시 사야도와 우 빤디따 사야도의 지도 아래 위빠사나 수행을 했으며, 같은 해에 숲 속에 들어가 수행을 했다. 그러다 1966년에는 탄린 사야도(Than Lyin Sayadaw)로부터 6개월 반 동안 4대 관찰 수행을 지도받았고, 쉐테인도 사야도(Shwe thein daw Sayadaw)로부터 3개월 반 동안 입출식념(호흡관) 수행을 지도받았다. 현재의 파욱 숲 속 센터에 정착하기 전에 3~4 곳의 숲 속 수행처에서 집중수행을 하였다. 그러다가 1981년 파욱 센터의 2대 주지스님이었던 악가빤냐(Aggapanna) 스님이 입적하시면서 이 수행처를 아친나 스님이 맡아서 지도하라는 유언을 하셨다. 그 이후 아친나 스님은 현재까지 24년 동안 파욱 센터에서 경전 연구와 수행지도를 해 오고 있다. ‘파욱 사야도’라는 호칭은 파욱 센터에 계시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사야도는 이러한 수행 이력과 해박한 교학의 지식을 바탕으로 순수 위빠사나 수행이 주류를 이루는 미얀마에서 사마타 수행 전통을 되살렸고, 이 수행을 체계적으로 지도하는 분으로 미얀마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대만이나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는 물론이고 미국 등지에서도 집중수행을 지도하고 계신다. 사야도가 가르치는 수행법들의 문헌적 근거는 빨리 초기경전과 『청정도론(淸淨道論)』, 그리고 아비담마 문헌들이다.”
『청정도론』의 선정 편에 언급된 40여 가지의 사마타 수행 대부분을 실제로 수행자들에게 지도하시는 것으로 봐도, 사야도는 확실히 사마타 수행의 대가이자 큰 스승이라고 할 수 있겠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마타 수행부터 시작하여 위빠사나 수행 그리고 도(道)와 과(果)를 얻어 수다원이 되기까지, 전 수행과정을 아주 심도 있고 체계적으로 지도하신다고 한다.
파욱 사야도가 지도하는 주요 수행법
사야도가 가르치시는 수행법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사마타 수행으로서의 호흡관(ànàpànasati) 수행법이고,
둘째는 사마타 수행으로서 네 가지 보호수행법이 있으며,
셋째는 4대 수행으로 시작하는 위빠사나 수행이 있다.
이 세 가지 수행법에서 호흡관은 사야도가 수행자들에게 삼매와 선정을 개발하게 하는 데 주로 이용하는 수행 주제이다. 수행자가 일정 기간 센터에서 머물며 호흡관 수행을 하면, 니밋따(nimitta, 心象, 혹은 表象)가 뜨면서 초선을 비롯한 4선정을 얻게 된다. 만약 수행자가 호흡관으로 4선정에 도달하고 다섯 가지 자유자재함을 숙달했으며 삼매로 인해 얻어진 빛이 밝게 빛날 때, 수행자가 원한다면 거기서 바로 위빠사나 수행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 그렇지 않다면 거기서 더 몸의 32부분에 대한 수행, 백골관, 색깔 까시나(kasina) 수행 등으로 무색계 4선정을 얻게 하는 사마타 수행을 하게 한다고 무념 스님이 번역한 『사마타 그리고 위빠사나』는 밝히고 있다.
그 다음 호흡관이나 흰색 까시나로 얻어진 선정의 빛을 바탕으로 자비희사 4무량심과 불수념(佛隨念), 죽음에 대해 명상하는 사념(死念), 그리고 부정관 등을 수행하게 한다. 이 네 가지는 수행자가 여러 가지 위험요소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고 보호해 주기 때문에, 보호 수행법이라고 한다. 수행자가 위빠사나 본수행으로 들어가기 전에 닦아야 할 가치 있는 수행이다.
그 다음은 사마타 수행으로 얻은 선정의 집중력을 바탕으로 4대 수행을 통한 위빠사나를 시작한다. 본격적인 위빠사나 수행에 앞서 두 단계를 거친다고 지산 스님이 ‘한별심리연구소’에서 발표했던 글은 밝히고 있는데, 사야도가 지도하는 위빠사나 수행에 대해 독자들에게 잘 전달하고 싶어 자세하게 인용하고자 한다.
첫 번째가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궁극적 실재를 분별 확인하는 단계이고, 두 번째가 12연기의 관찰을 통해 모든 현상의 인과를 살펴보는 단계이다. 이 두 단계가 파욱 센터에서의 수행을 다른 순수 위빠사나 수행과 구별 짓는 깊이 있는 수행이라고 한다.
첫 번째 단계에서 몸을 대상으로 지수화풍 4대를 관찰함으로써 물질을 이루는 극미 요소인 깔라빠(kalàpa)를 확인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깔라빠를 구성하는 기본요소인 지수화풍 4대와 색깔·냄새·맛·영양소와 부차적 요소인 감성물질 요소·성(性) 요소·심장 토대 요소들까지 확인한다. 이 단계까지 확인해야만 물질의 궁극적 실재를 본 것이고, 그래야만 제대로 위빠사나를 진행할 수 있다고 한다. 깔라빠의 요소들을 확인한 다음에는 한 깔라빠가 생멸할 때, 17번 생멸한다는 심찰라를 확인한다. 또한 낱낱의 마음[心]과 마음부수[心所]들의 생멸을 확인한다. 이 단계까지 봐야만 정신의 궁극적 실재를 본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낱낱이 깔라빠의 생멸과 심찰라의 생멸을 보아야만 진정한 위빠사나 수행이 가능하다는 취지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자신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서 과거 어느 시점에 작용했던 마음상태에서의 마음부수들과 대상을 확인하는 훈련을 반복하며, 점점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금생의 첫 순간, 전생의 마지막 순간의 마음 작용과 대상을 확인함으로써 전생의 어떤 업으로 인해 금생에 이런 상태로 태어나게 되었는지를 확인한다. 말하자면 12연기를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단계인데, 이러한 과정들이 다른 순수 위빠사나 수행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과정이며, 그러기 위해서 선정을 통한 강한 집중력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 두 과정이 보통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의 과정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에 해당되는 단계인데, 세 번째 단계부터가 본격적인 위빠사나 수행으로 깔라빠의 생멸과 심찰라의 생멸을 대상으로 무상·고·무아의 삼 특성 관찰을 시작한다. 그 뒤로 위빠사나 지혜가 계속 진전되어 11번째 단계인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에 이르게 되고, 여기에서 관찰을 깊게 해 나가면 마침내 모든 현상의 소멸을 체험하면서 열반을 증득하기에 이른다.
대개의 경우 처음 열반을 증득하기 전에 수행자는 색계 초선에 든다. 그 뒤에 색계 초선에서 나와 초선에 있었던 선정 요소를 반조하면서 그것들의 무상이나 고·무아의 한 특성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열반을 체득하게 된다. 일단 열반을 증득한 사람은 그 뒤 수다원과 의식 상태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훈련을 받으며, 이 훈련이 완료되면 사야도는 손을 떼고 그 뒤의 수행은 각자에게 맡기는 듯하다.

여기까지가 파욱 사야도가 지도하시는 위빠사나 수행으로 수다원과에 들기까지의 전 수행과정을 간략하게 요약한 것이다.

호흡관 수행법이 차지하는 위상과 문헌적 근거
빨리(Pàli) 초기경전인 『상응부(SN Ⅴ, 317, 328)』에 의하면, 부처님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전 보살 시절에 열심히 닦고 익혔던 수행법은 입출식념, 즉 들숨날숨을 관찰하는 호흡관 수행이다. 부처님은 바로 이 수행법을 통해서 완전히 해탈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은 깨달은 이후 우안거 결제 중에도 늘 이 호흡관 삼매에 머무셨다. 그러면서 이 호흡관 삼매는 성인, 브라마, 여래의 거처가 되고, 또한 이생에 행복하게 머무는 거처가 된다고 한다. 이렇게 부처님이 깨닫기 전에는 물론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실 때, 그리고 깨달은 이후에도 늘 이 호흡관 수행을 하셨음을 살펴볼 때, 우리는 호흡관 수행이 바로 부처님의 수행법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열반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했던 『대념처경』의 4념처에서 이 호흡관이 언제나 첫 번째 수행법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선정을 얻는 수행에서 이 호흡관은 가장 으뜸이자 근본이 되는 수행 주제라고 하며, 보통 모든 부처님들이 다 이 호흡관 수행을 통해서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신다고 한다.
이렇게 호흡관 수행법은 초기불교에서나 남방 수행전통에서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수행법의 근거는 『입출식념경』, 『대념처경』 그리고 『청정도론』이다. 『대념처경』은 호흡관을 비롯한 4념처의 여러 수행 방법들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다. 그것에 비해서 『입출식념경』은 호흡관 수행법을 전문적으로 다루는데, 16단계로 설명하면서 그것들을 다시 신수심법 4념처로 나누고 있다. 그럼 먼저 『입출식념경』의 호흡관 수행 부분에서 신념처 부분을 인용하고자 한다. 이 부분에 대한 경전의 이해가 선행될 때, 사야도의 법문을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그는 숨을 길게 들이쉬면서, ‘나는 길게 들이쉰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는 숨을 길게 내쉬면서, ‘나는 길게 내쉰다’라고 알아차린다.
2. 그는 숨을 짧게 들이쉬면서, ‘나는 짧게 들이쉰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는 숨을 짧게 내쉬면서, ‘나는 짧게 내쉰다’라고 알아차린다.
3. ‘나는 호흡의 전체를 경험하면서 숨을 들이쉴 것이다’라고 수행하며,
‘나는 호흡의 전체를 경험하면서 숨을 내쉴 것이다’라고 수행한다.
4. ‘나는 몸의 작용을 고요하게 하면서 숨을 들이쉴 것이다’라고 수행하며,
‘나는 몸의 작용을 고요하게 하면서 숨을 내쉴 것이다’라고 수행한다.
이것이 호흡관의 16단계에서 첫 번째 네 단계이다. 주석서는 이 부분을 선정을 얻기 위한 사마타 수행으로 설명하고 있고, 파욱 사야도도 이 주석 전통을 따라 사마타 수행으로 수행자를 인도하고 있다.

파욱 사야도가 지도하는 사마타 수행으로서의 호흡관 수행법
이 부분은 11월 30일 사야도의 첫 번째 저녁법문(조성순 법우 통역)의 내용으로 대신한다. 법문이 중심이되 다른 책들을 참고하면서 약간의 첨삭을 했다.
“부처님 당시부터 비구, 비구니, 사미, 사마니, 재가신자 여러분들은 다함께 모여 수행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부처님의 법을 얻고, 수행을 통해 목표한 바를 성취하기 위해 여기 이 자리에서 모이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수행이란 계율의 청정[戒淸淨]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8계를 받아서 계율의 청정을 이룬 다음에는, 마음의 청정[心淸淨]이 필요합니다. 마음의 청정을 위해서 여러분은 근접삼매(upacàràsamàdhi)와 본 삼매(appàna-samàdhi), 즉 색계 4선과 무색계 4선을 닦아야 합니다. 그럼 왜 여덟 가지 선정을 닦아야 하는가? 여덟 가지 선정을 닦아야 하는 이유는 궁극적인 진리인 빠라맛타(paramattha)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선정을 얻게 되면 가장 먼저 궁극적인 진리인 궁극적인 물질과 정신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선정을 닦은 후 빛을 얻어서, 그 빛과 삼매의 힘으로 여러분은 우리 몸 안에 있는 물질과 정신을 볼 수 있습니다. 빛의 도움을 받을 때에만 궁극적인 물질과 정신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상응부 진리상응(sacca-samyutta)에서 부처님은 4성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고집멸도 4성제를 모르면, 우리는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삼매를 닦아 그 삼매의 힘으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때, 4성제를 정확하게 보고 알 수 있습니다. 4성제를 있는 그대로 보고 알 때, 우리는 열반에 도달하고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4성제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과 정신의 무더기[五蘊]가 바로 고(苦)입니다. 고의 원인이 되는 갈애가 바로 집(執)입니다. 고와 집은 여러분이 향상 발전시켜야 할 위빠사나의 대상입니다. 고제와 집제를 그냥 보는 것인 아니라 무상·고·무아, 삼법인으로 보면서 위빠사나 수행을 닦아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단계별로 위빠사나를 계속 수행해 나갈 때, 여러분의 수행은 향상되어서 마침내는 도(道, magga)와 과(果, phala)를 얻게 될 것입니다. 도와 과를 얻을 때 여러분은 궁극적인 평안함(열반)을 대상으로 가지면서 도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선정과 삼매의 도움 없이는 최종의 목표인 도와 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4성제를 본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如實知見]입니다. 상응부 진리상응(sacca-samyutta)의 『삼매경(samadhi-sutta, SN Ⅴ, 414)』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비구여, 삼매를 개발하십시오. 삼매가 있을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 무엇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하는가? 곧 4성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삼매를 개발하면 우리가 보아야 하는 대상인 4성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삼매를 개발하기 위해서 『청정도론』에 나온 40여 가지의 사마타 수행주제 중에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설명할 것은 바로 아나빠나사띠(a-na-pa-nasati, 호흡관)입니다. 아나빠나사띠는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 두 가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지금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사마타 수행법으로서의 아나빠나사띠입니다.
아나빠나사띠 수행을 할 때는 보통 좌선의 자세가 좋습니다. 허리를 곧게 펴고 다리는 결가부좌나 반가부좌처럼 겹치는 것보다, 나란히 놓는 평좌가 좋습니다. 곧으면서도 편안하게 앉은 자세는 몸에 긴장이나 피로를 주지 않아서 오랫동안 앉아 있을 수 있게 합니다. 그럼 지금 수행자가 염두에 두어야 할 수행법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들숨날숨이 긴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둘째, 들숨날숨이 짧은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셋째, (들숨날숨의) 시작과 끝을 알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넷째, 들숨날숨이 고요해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 수행자는 먼저 숨이 길고 짧은 것을 알아야 하는데, 숨이 길고 짧은 것은 숨의 길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숨의 시간을 말합니다. 때에 따라 숨이 길고 짧을 때가 있는데,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이것을 인위적으로 길게 하거나 짧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호흡을 길면 길다고, 짧으면 짧다고 다만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 그 다음으로 수행자는 들숨날숨이 길든 짧든, 호흡의 시작과 끝(호흡의 전체)을 다 알아차리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설령 숨이 가빠서 호흡이 짧더라도 시작과 끝을 분명하게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들숨날숨을 지켜볼 때, ‘호흡의 시작과 끝을 어디에서 봐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코끝이나 윗입술 사이, 어느 곳이든지 숨이 두드러지게 부딪히고 접촉되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곳의 한 점에 마음을 챙기고, 호흡이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호흡의 시작과 끝을 지켜봐야 합니다. 윗입술 부분이 좀 더 명확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사람마다 차이가 있으므로 수행자들 스스로가 바람이 부딪히면서 분명하게 느껴지는 곳에 마음을 고정시키고 보십시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몸 안으로 바람을 따라가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바람을 따라가게 되면 그것은 4대 수행이 됩니다. 바람이 코끝이나 윗입술 사이에 부딪히면서 가장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곳에 마음을 고정시키고 들숨날숨을 보아야 합니다. 코끝이나 입술 위를 보지 않고 바람의 움직임을 따라가게 되면, 그것은 4대 중에서 풍대를 보는 수행이 됩니다. 그것을 보게 되면 코가 딱딱해져서 있는 그대로의 들숨날숨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여러분이 나중에 4대 관찰을 따로 시작하게 되면 그때는 몸 전체를 보게 될 것입니다만, 지금 여기서 하고자 하는 것은 아나빠나사띠이기 때문에, 코끝이나 입술 위 어느 한 부분을 봐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호흡이 두드러지게 접촉되는 한 점에 마음을 두고 들숨날숨을 지켜보십시오. 들숨날숨을 보는 이것은 빠라맛타, 즉 궁극적인 진리를 보는 것이 아니고 빤냐띠(paññatti), 즉 개념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들숨은 들숨으로 알아차리고, 날숨은 날숨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 그리고 다음은 들숨날숨을 보면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단계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호흡을 고요하게 지켜볼 수 없다면, 『청정도론』 주석서에서는 호흡의 숫자를 세도록 설명합니다. 그러나 만약 들숨날숨을 고요한 상태에서 분명하게 지켜볼 수 있다면, 굳이 숫자를 셀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이 호흡이라는 대상에 머물지 않고 자꾸 밖으로 향해 나갈 때, 여러분은 호흡과 함께 숫자를 세는 방법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들숨날숨을 쉬면서 그 끝에 숫자를 세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번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하나’
다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둘’
그 다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셋’ ......’
그와 같이 해서 여덟까지 셉니다.
이렇게 들숨날숨을 여덟까지 세는 동안 여러분은 ‘내가 오로지 여기에만 마음을 집중하리라’ 하고 단단하게 마음을 먹으면서 시도해 보십시오. 좌선 시 마음이 들숨날숨에 한 시간, 혹은 한 시간 30분 정도 고요하게 유지될 수 있다면, 숫자를 세는 방법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30분이나 한 시간도 고요하게 유지될 수 없을 때, 여러분은 숫자를 세는 방법으로 마음의 고요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럼 이것으로써 오늘 법문을 마칩니다. 오늘 배운 방법으로 수행을 계속해 보시기 바랍니다.”
파욱 사야도의 호흡관은 어떻게 다른가
그럼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파욱 사야도가 지도하시는 호흡관 수행을 다른 전통의 수행법과 간단히 비교해 보고자 한다. 마하시 전통의 수행법에는 들숨날숨을 관찰하는 호흡관 수행법이 사실 없다고 본다. 호흡으로 인한 배의 일어남, 사라짐을 관찰하는 것은 호흡관이 아니라, 지수화풍 4대(四大)에서 공기, 바람의 요소를 관찰하는 풍대(風大) 수행이라고 한다.
그리고 고엥까가 지도하는 호흡관 수행법은 파욱 사야도가 가르치는 호흡관 수행법과 유사한 점도 있으나, 분명한 차이가 있다. 유사한 점이라면 고엥까나 파욱 사야도가 모두 이 호흡관을 하면서 들숨날숨을 지켜보는 장소를 코끝이나 윗입술의 한 지점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고엥까가 지도하는 호흡관은 사띠와 집중력을 기르는 데 초점을 둘 뿐 선정으로 이끌지 않고, 들숨날숨을 지켜보는 단계가 지나면 바로 동일한 장소인 코끝이나 윗입술의 한 지점에서 감촉과 느낌(감각)을 보게 한다. 이 두 가지 점으로 볼 때, 고엥까가 가르치는 호흡관은 사실 사마타라고 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런 반면 파욱 사야도는 호흡관을 4선정으로 이끄는 데 초점을 맞추고, 수행이 진전됨에 따라 니밋타(nimitta)를 통해 선정에 들어가도록 지도한다는 점에서, 파욱 사야도가 지도하는 호흡관이 『청정도론』에서 설명하는 사마타와 일치한다. 그리고 선정을 바탕으로 한 위빠사나를 수행하기 때문에. ‘계정혜 3학’이라는 수행의 근본체계를 가장 완전하게 이행하는 수행전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중(一中) 스님 운문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스리랑카로 건너가 켈라니아대학교 불교철학과에서 빨리 원전을 공부하며 불교철학을 전공했다. 그 후 미얀마 파욱 센터와 마하시 센터에서 우안거를 지냈고, 인도 델리대학교 불교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현재 박사과정에서 논문을 쓰고 있다. 인도 델리에 머물며 1993년 우바 킨, 고엥까 전통의 위빠사나 수행을 접하였고 1998년부터는 여러 차례 집중수행 코스에 참가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스리랑카 승가의 교학체계와 수행체계 조사」, 「고엔카수행법과 『대념처경』」 등이 있고, 번역문으로는 「위빠사나 10일 코스 법문요약」 등이 있다.

원 글 인용: http://cafe255.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1705v&fldid=CvtI&contentval=0001Gzzzzzzzzzzzzzzzzzzzzzzzzz&nenc=fPv.aHpKqgH8Ur1jyqkIuA00&data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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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r.p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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